나는 누구인가 - 연안지대와 산 :: hauntedwebsite Angelfish

취향이 확고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음악은 인디 컨트리부터 일렉트로닉 하우스까지 듣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캐릭터는 미피와 농담곰인데 라이터는 지포입니다. 영화는 라스 트리에부터 마블까지 다양하게 봅니다.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2년쯤 전입니다.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던 액션이나 첩보 영화가 세상의 전부인 알았으므로 영화는 단순 오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귀었던 사람은 공포영화를 좋아했습니다. 마더!(2017) 로우(2016), 지구를 지켜라!(2003) 등의 영화들을 함께 시청했는데, 이런 내용의 영화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외에는 없었습니다. 티탄(2021),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 (1985), 도그빌(2003) 등의 영화를 많게는 하루 편씩도 봤습니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것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최근에는 안똔 체홉의 바냐 삼촌이나 와즈디 무아와드의 연안지대, 그리고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의 작품들을 감상했습니다. 와즈디 무아와드의 화염을 직접 기회가 없었던 한인데, 대신 닭이라고 친구와 함께 대본 리딩을 했었습니다. 방음이 탁월하지는 못한 원룸에서 시몽이 나왈에게 온갖 상스러운 욕을 하는 것을 소리를 질러가며 몰입해 읽었습니다. 그러자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2010)에서는 나왈의 비극이 드러나고. 와즈디 무아와드의 화염에서는 나왈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물론, 화염은 직접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이므로 원작이 정말로 어떤지는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저는 나왈이었고 나왈은 악한 것마저도 사랑으로부터 태어났으니 오롯이 사랑할 있지 않겠냐 전합니다. 잔느와 시몽도 사랑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화염과 함께 와즈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 번째인 연안지대는 익살스럽게 시작했습니다. “따르릉따르릉와보세요여보세요아버지가돌아가셨어요라며 구호를 외치는 , 또한 노래하는 윌프리드의 상황이 꿈이나 환각처럼 소개됩니다. 인물들도 익살스러운 톤이 가득하게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담하다 못해 관객을 끌어다 무릎을 꿇리고 총구를 들이밀듯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곳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고되게 시체를 짊어지고 나르는 와중 윌프리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엿보고, 새로이 만난 친구들의 사랑을 느끼고, 시체가 온통 썩어 문드러지면 울면서 무너진 몸을 닦아드립니다. 화염이 어머니이고 여성의 불길이었으면 연안지대는 아버지이고 외로운 바다입니다. 극은 이렇게 끝납니다. “사랑과 고통 바로 너머에 기쁨과 눈물, 상실과 외침, 연안지대와 거대한 바다가 있지. 모든 앗아가고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끄는나를 이끌고, 이끌고, 이끌고, 나를 이끄는 거대한 바다가….”

바다보다는 근처에 살았던 저도 바다라면 좋아합니다. 보편성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장례에 대해 이야기했을 친구는 바다에 그대로 버려져서 해양생물에게 먹히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왕 먹힌다면 산짐승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바다가 보고 싶다고 졸라서 아버지께서 차를 타고 시간을 가서 한밤중에 바다에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어두웠고 파도 소리가 컸습니다. 해변이 어디서 끝나고 물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아볼 없어서 무서웠습니다. 펑펑 우는 저를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곤란해하셨습니다. 부터일지, 혹은 전부터 그랬는지, 바다만 생각하면 갑갑하게 위장이 꼬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아합니다.

산을 타고 용수철처럼 꼬인 길을 가다 보면 차에 치여 죽은 동물들이 있었고, 어머니와 저는 차를 세워두고 두꺼비나 족제비의 사체를 주워다 묻어주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은 것이 두렵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살아서 뛰노는 것이 있다면 죽은 있는 것이 당연했고, 지네와 공벌레와 개미가 가죽을 뚫고 살을 파먹고 남은 것이 일반쓰레기 봉투에 담긴 휴지나 포장지 따위보다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장례식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염한 시체를 적도 없습니다. 제게는 어쩌면 그게 무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있으면 싫어하는 있고,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미워서 견딜 없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싫어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고 참을 없이 혐오하는 것은 비인간성입니다. 아직 머리가 뜨거울 나이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전쟁이나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혹은 본모습일지도 모릅니다)에는 쉽게 분노해놓고 누가 맛있는 밥이라도 사주면 금방 웃고 떠듭니다. 강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는데, 이렇게 두서없이 글에는 스스로 지적을 늘어놓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버스가 흔들리면 지팡이를 짚고도 서있는 힘들기 때문에 내심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짜증도 납니다. 의견이 맞지 않는 말을 면전에서 들으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는 나이가 되면 제가 지혜롭고 멋들어진 사람이 되어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자주 구질구질하기만 합니다. 원칙을 이해하면서도 저만 예외이고 싶은 얌체 같은 마음부터, 불리하면 규칙 따위는 지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반항적인 성향까지 전부 그렇습니다. 격려보다 자책이 잦지 않은가 생각해보았지만 자책하지 않는 삶이 자랑스럽기도 어려울 같습니다. 인간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까. 잠시 돌이켜보고, 수치를 느끼고, 그로부터 달라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자신을 보듬기만 해서는 어리석은 년이나 보내야 두려워 오늘도 스스로에게는 심드렁합니다.